믿음은 가능성을 봅니다_Larry R. Evans, 목회학박사_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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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웹관리자 댓글 0건 조회수 1,308회 등록일 2023.05.0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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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가능성을 봅니다

             설교자_래리 에반스 (Larry R. Evans, 목회학 박사) 


2023년, 장애인의 날은 4월 22일입니다. 하나님은 장애인을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장애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랑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역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필수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히브리서 11:6) 


또한, 예수님처럼 충성된 종으로 이 사역을 할 때 보람과 행복이라는 하늘의 상이 주어집니다. 

아마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상이 아닐까요?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 (마태복음 25:21)


미국의 유명한 음악가 레이 찰스(Ray Charles, 1930. 9. 23 - 2004. 6. 10)는 

일곱 살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뭔가 끼이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시야가 흐릿하고 어스름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시력을 잃었고, 완전한 어둠 속에 남겨졌습니다. 

어린 시절 레이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던 밭떼기 바로 옆에 있는 단칸방 판잣집에서 가족이 살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집안으로 달려가 그만 의자에 걸려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레이는 엄마를 찾아 

부르짖고, 엄마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아이를 붙잡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일을 멈추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어나 가만히 서 있습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았습니다.


레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꼼짝 않고 있더니만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등 뒤 장작 난로 위에서 물이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깥에서는 옥수수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집 근처 흙길에서는 말과 마차가 털컹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레이는 가까이에서 나는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

였습니다. 마치 뭔가를 긁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것이 메뚜기라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팔을 뻗었고, 메뚜기를 잡아챘습니다. 메뚜기를 손에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엄마 말 듣고 있어요, 엄마.” 기특한 마음과 함께 슬픔과 놀람이 교차된 레이의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로 인해 

엉엉 울었습니다. 레이는 언젠가 이렇게 밝힌 적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듣습니다.”


“보는 것처럼 듣습니다!” 

믿음에 관한 기막힌 명언이 아닐까요? 

들을 수 있다면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은 혼란스럽고 어려울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브리서 11:27)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 들을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배우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나님이 예전에 하신 일과 지금 하시는 일과 앞으로 하실 일을 신뢰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삶은 희망과 목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믿음은 종종 배움의 경험입니다. 믿음은 우리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도 변화시킵니다.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전에 보기 힘들었던 가능성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9:1-41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레이 찰스보다 훨씬 이전 세대에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한 남자 곁에 있던 어머니는 이해심이 

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은 단지 그 사람의 시각장애는 보았으나 

가능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하셨습니다.


그 시각장애인의 부모는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상실했는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왜 사람들이 

부모에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에 귀 기울이라고 요청하는 이 이야기에는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의 복음서가 

들려주는 그 이야기를 경청함으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는 예수님의 진리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가능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역사합니다.

2. 믿음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는 하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3. 믿음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첫째, 믿음은 타인의 가능성을 봅니다

요한복음 9장은 제자들이 본다고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한복음 9:1~2)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행하던 중에 이 사람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도자 

교육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들이 주님의 지도자가 되려면 이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익숙한 문화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맹인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을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한복음 9:3~5)     


예수님은 그 사람의 시각장애보다 더 많은 것을 보셨습니다. 고통은 반드시 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의 시각장애는 

그 사람이나 그의 부모 안에 있는 죄로 인한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 이 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셨습니다. 시각장애의 밤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로부터 오는 빛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빛은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랐을지라도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유대의 지도자들은,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기회로 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한 통찰을 배우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은 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음에 일어난 일은 창세기라는 교과서에서 따온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땅의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창 2:7; 요 9:6). 

그 사람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한복음 9:5~7) 


제자 요한은 그 연못의 이름이 실제로는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임을 지적합니다. 

그 사람은 시각장애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해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치유하고 회복하고 모두를 위한 희망을 보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고통과 죄와 반역 그 너머를 볼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아도 이 세상의 비참함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죄 이상의 것, 불행 이상의 것을 보십니다. 그분은 무한한 지혜와 사랑으로 사람의 가능성,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이를 보십니다. 그분은 비록 인류가 그들에게 베푸신 자비와 하나님께 받은 위엄을 오용했을지라도 창조주께서 

그들의 구속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을 아십니다. (교회증언 7권, 269)


둘째, 믿음은 특별한 하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에게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보는 것은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습니다(창 1:26~27). 그런데 그 형상을 가리고 중상하는 것이 사탄이 세심하게 계획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일컬어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요 10:10)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것은 육체만이 

아닙니다. 사탄은 개인의 가치나 유용성을 떨어뜨리는 악랄한 오명을 덮어씌움으로 이를 수행합니다.


제자들은 어찌 보면 순진하게 사회의 뿌리 깊은 믿음, 곧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를 되풀이함으로 사탄의 일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맹인과 그의 부모의 도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애정 어린 예수님은 치유의 손으로 날 때부터 맹인인 그의 눈에 진흙을 조심스럽게 바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셨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아담은 그분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사탄의 거짓말을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태초부터 그렸던 계획, 곧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태복음 9:35)


정말 놀라운 상징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고통 받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쉽고 빠르게 오지 않습니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의 경험에서 이런 과정을 봅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을 “그 사람”(11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지자”(17절),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께로부터”(33절) 온 사람이라고 호칭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그의 믿음을 봅니다(35-38절). 다른 사람에게서 가능성을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이것은 비교하고, 비판하고, 모든 것을 증오하는 이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은 

이러한 장애물이나 굴욕적인 낙인으로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일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그러나 권리를 옹호하는 그 이상의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영혼들에게 선을 행하고자 한다면, 이 영혼들에 대한 우리의 성공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공감에 비례할 것입니다. 몸부림치는 영혼에게 보인 존경심은 그 사람이 잃어버렸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데 있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확실한 수단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진전적인 우리의 생각은 우리 스스로 온전히 

깨달을 수 없는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280~281)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믿어줄 수 없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도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이례적으로 하늘이 주는 선물입니다. 이러한 선물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믿어주며 그들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이사야 4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마가복음 9:23)


셋째, 믿음은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네 가지 다른 반응을 봅니다. 

이웃들은 놀라움과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불신과 편견을 보였습니다. 

부모는 믿었으나 종교적, 사회적 따돌림이 두려워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치유를 받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 9:32~33)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각각의 반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을 치유하신 분이 누구인지 찾는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한복음 9:35~36) 


예수님 안에서 그는 언제가 곁에 있었던 품위를 찾았고, 전에 경험했던 그 이상의 희망을 발견했고, 삶을 위한 

새로운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한된 시야를 가지고 살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시력 그 이상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장애 너머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산과 같은 편견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그분[그리스도]은 각 사람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알아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보시되, 그들이 변화될 수 있다고, 그분의 

은혜  곧  “주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시 90:17, 한글킹제임스)으로 변모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

보신 그리스도는 희망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신 그리스도는 믿음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인류의 참된 

이상을 자신의 삶에서 드러내신 그리스도는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열망과 믿음을 깨우치셨습니다. (교육, 80) 


오늘날 세계에는 심각한 장애나 손실을 겪는 사람이 12억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런데 지구의 인구는 80 억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재능을 받았고, 재능이 필요하며, 사랑이 필요합니다. 낙인을 찍음으로 청각장애인, 시각장애인 그리고 신체적, 정신

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고립되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종종 고립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낙인을 찍고, 죽이고, 우리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서 빼앗기 위해 애를 씁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한복음 10:11~12)


우리는 혼자서 사역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예수님 안에서 보고, 듣고, 걷고, 말하는 능력이 

회복되는 이야기를 나누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저술가가 말한 것처럼 “장애인이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장애 사역도 없습니다.”


초기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로마 교회의 집사였던 라우렌티오스(225. 12. 31 - 258. 8. 10)는 교회의 보물을 황제 앞에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나이든 사람, 찾을 수 있는 장애인을 모두 모았고, 

그들을 황제에게 데려갔습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교회의 보물들이 있습니다!” 그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들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심이 우리를 이끌어 서로의 틀린 점이 아니라 다른 점을 보게 합니다. 

믿음 없이는 그 다른 점이 장애물이 되지만,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6~17)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부분이 협력해야 합니다! 아무도 제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


모든 사람은 재능을 받았고, 이 마지막 시대를 위한 희망과 목적의 기별을 전해야 합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보물이며, 이 사역 운동에 있어 그분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고 바울이 설교한 것처럼 우리는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보지”(고후 5:16, 현대인)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변화를 받게 될 때, 우리는 다르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가능성을 믿게 될 것입니다.


호소_(예화) 벌써 23년 전의 일입니다. 이화여대를 다니던 한 여학생이 자동차 사고로 전신화상을 입었습니다. 

만취 상태의 운전자가 몰던 차량으로 씻을 수 없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수술만 40차례,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본교의 교수로 강단에 섰습니다. <지선아 사랑해> 의 저자 이지선 교수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일 때, 저를 향한 완벽한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어요. 

그 손길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아니까 그 손길에 연결되지 못한 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병원에 있으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래서 공부를 해야 겠구나 결심했어요."


믿음으로 장애인 사역에 헌신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교회의 보물로 보는 

시각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지만 빛 되시는 

주님을 믿고 선한 일을 함으로 우리는 빛의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마음을 열고 예수님께서 주신 세 가지 영원한 진리를 오늘 실천합시다. 


1.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가능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역사합니다.

2. 믿음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는 하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3. 믿음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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